대한민국 헌법은 국가 권력의 출발점이자 한계를 동시에 규정한다. 모든 공적 권한은 헌법에 근거해 부여되며, 그 행사는 다시 헌법과 법률에 의해 통제된다. 이는 개인이나 특정 기관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법치국가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다. 공적 책임을 확인하는 절차는 이러한 헌법 질서를 현실에서 작동하게 하는 핵심 장치다. 헌법 제1조가 선언하듯,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원칙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위임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위임 이후에도 권력의 행사 과정은 지속적으로 검증받아야 하며, 그 검증은 법률에 정해진 절차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헌법이 전제하는 책임 정치이자 법치 행정의 기본 구조다. 공적 책임을 확인하는 절차는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제도다. 법치국가에서 권력은 신뢰가 아니라 규범에 의해 유지된다. 권한의 범위, 행사 방식, 사후 검증 절차가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권력은 필연적으로 자의성을 낳는다. 헌법과 법률이 요구하는 절차적 통제는 권력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보호하는 장치다. 이러한 절차의 핵심은 사실 확인과 법적 평가의 분리다. 헌법 질서 안에서 공적
제1야당 대표의 단식이 장기화되고 있다. 정치적 계산이든, 극단적 항의 방식이든 그 평가는 엇갈릴 수 있다. 대통령은 단식중인 제1야당 대표의 단식 현장을 찾아 그 이유부터 들어야 봐야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있다. 단식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대통령이 침묵으로 일관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대통령이 직접 현장을 찾아 단식의 이유를 듣는 것이 국가 지도자로서의 최소한의 책무다. 어떻게 보면 대통령의 그런 모습이 양분화 되어 있는된 국민통합으로 이루어질수도 있는 문제이므로 파격적인 행보는 크게 손해 볼 일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결정은 이대통령의 몫이다. 그것이 모두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식은 정치적 메시지의 최후 수단이다. 대화의 문이 닫혔다고 느낄 때 선택되는 극단적 방식이다. 그렇다면 그 신호를 가장 먼저 읽고 응답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대통령이다. “정치 공세”라는 말로 치부하거나, 거리 두기로 일관하는 태도는 갈등을 해소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 대통령의 방문은 굴복이 아니다. 정치적 양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국정 최고 책임자가 갈등의 당사자에게 직접 이유를 묻고, 국가적 위기의 신호
정치는 국민의 삶을 안정시키고 내일을 준비하게 하는 공적 장치다. 그러나 최근의 정치 풍경은 그 본령과 거꾸로 가고 있다. 정쟁은 일상이 되었고, 책임은 실종되었으며, 국정은 표류하고 있다. 권력은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만 할 뿐, 민생 앞에서는 침묵한다. 이 혼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국민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정치권의 모습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확대”에 가깝다. 사안마다 여야는 합리적 해법보다 정치적 유불리를 먼저 계산한다. 국회는 토론의 장이 아니라 대결의 링이 되었고, 정책은 협의의 산물이 아니라 정파적 선언문이 되었다. 그 사이 서민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자영업자는 버티기조차 힘겨워하며, 청년들은 미래를 설계할 토대를 잃어가고 있다. 정치적 혼란의 대가는 고스란히 국민이 치른다. 경제 불확실성은 투자와 일자리를 위축시키고, 외교·안보의 신뢰도는 흔들린다. 행정은 결단을 미루고, 정책은 표류한다. 국정이 멈추면 사회의 시계도 멈춘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수록, 사회적 갈등은 깊어지고 공동체의 연대는 약해진다. 더 큰 문제는 책임의 실종이다. 혼란이 반복되는데도 사과하는 이는 드물고, 책임지는 이
새해애도 어김없이 '내로남불'이 일상화 되는 느낌이다. 공정과 정의를 외치던 목소리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 순간 달라지는 장면을 우리는 너무 자주 목격해 왔다. 남에게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는 무한한 관용을 베푸는 태도. 이른바 ‘내로남불’은 더 이상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구조적으로 고착된 병리 현상이 되었다. 문제는 그 폐해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제는 비판의 대상이었던 일이 오늘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된다. 과거에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던 사안이 입장이 바뀌면 ‘정무적 판단’으로 둔갑한다. 원칙은 상황에 따라 접혔다 펴지는 선택지가 되었고, 기준은 적용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이 과정에서 일관성은 사라지고, 국민의 판단 기준은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공기관에서는 책임 회피가 관행처럼 반복되고, 사법 영역에서는 선택적 엄정함이 의심을 낳는다. 언론과 시민사회를 자처하는 일부 영역에서도 자신에게 불리한 문제에는 침묵하거나 논점을 흐리는 일이 적지 않다. 비판의 잣대가 공익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때, 그 피해는 결국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내로남불이
2026년 병오년(丙午年)의 새 아침이 밝았다. 말의 해가 지닌 역동성과 불의 기운은 늘 변화와 전환을 상징해 왔다. 그러나 새해가 단지 달력의 교체에 그친다면, 병오년의 의미는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새해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성찰하고 무엇을 바꾸려는가에 따라 비로소 시작된다. 지난 한 해 우리 사회는 크고 작은 균열을 겪었다. 법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 제도의 신뢰 상실, 책임을 회피하는 권력, 그리고 분열을 부추기는 언어들이 공동체의 근간을 흔들었다. 성장과 효율이라는 명분 아래 기본 원칙이 후순위로 밀려났고, 그 결과 사회 곳곳에는 피로와 냉소가 깊게 스며들었다. 문제는 위기 그 자체가 아니라, 위기에 대한 태도였다. 병오년은 결단의 해여야 한다. 불합리와 타협해 온 관행, 불법과 부정을 눈감아 온 구조, 책임을 남에게 전가해 온 정치와 행정의 오래된 습속을 과감히 끊어내지 않는다면, 새해는 또 하나의 반복된 실망으로 기록될 것이다. 새 출발은 미봉책이 아니라 원칙의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특히 공적 권한을 위임받은 이들의 자세는 새해의 성패를 좌우한다. 법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 말로만 책임을 말하는 무책임, 국민을 분열
을사년의 해가 저물고 있다. 석양은 늘 하루의 끝을 알리지만, 올해의 석양은 유난히 무겁다. 한 해 동안 우리 사회 곳곳에 쌓여온 불법과 탈법, 부정과 특혜의 그림자가 여전히 걷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석양은 단순한 연말의 풍경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무엇을 정리하지 못했는지를 비추는 마지막 빛이다. 법치는 민주주의의 토대다. 그러나 법이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을 때,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는다. 우리는 올해도 수차례 확인했다. 법 앞의 평등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권력과 이해관계 앞에서 정의가 얼마나 자주 유보되는지를 말이다. 의혹은 반복되었지만 책임은 희미했고, 진실 규명은 지연되거나 정치적 공방 속에 소모되었다. 불법과 부정이 위험한 이유는 사회를 한순간에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공동체의 신뢰를 잠식한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시민에게 허탈감을 안기고, 법을 지키는 이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그 결과 “정직함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사회 전반에 퍼지게 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자주 “관행이었다”는 말로 문제를 덮어왔다. 정치적 부담, 사회적 파장, 국정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불법과 탈법은 미뤄졌고, 부정은
2025년의 마지막 성탄절이 지나고 있다. 성탄은 위로의 언어이자, 동시에 성찰의 요구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국가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권력은 국민의 삶을 얼마나 덜 무겁게 했는가, 제도는 사회의 불안을 얼마나 덜어주었는가. 그러나 올해의 대한민국은 안정과 희망보다는 피로와 분열의 기억이 더 짙다. 정치의 책임은 가장 먼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회는 여전히 갈등의 정치를 반복했고, 협치는 구호로만 남았다. 필리버스터 중단 논란과 속도전에 가까운 입법 과정은 민주주의가 절차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다. 다수의 힘은 법을 만들 수 있지만, 정당성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소수의 목소리를 견디지 못하는 정치는 결국 다수의 신뢰도 잃게 된다. 민주주의는 빠른 결정이 아니라, 숙고된 결정을 통해 완성된다. 경제는 국민의 체감 온도에서 가장 냉정한 평가를 받는다. 고환율과 경기 둔화, 생활비 부담은 숫자가 아니라 일상의 불안으로 다가왔다. 정부는 여러 차례 대책을 내놓았지만, 시장과 국민이 원하는 것은 정책의 나열이 아니라 일관된 방향이다. 단기 처방이 반복될수록 신뢰는 소진된다. 경제 정책의 신뢰는 말이 아니라 예측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흑백 논리와 변곡으로 다사다난 했던 2025년도 이제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2025년의 끝에서 국정을 돌아보는 질문은 더 이상 수사적일 수 없다. 지난 1년간 국가 운영의 중심이 과연 국민에게 있었는지, 아니면 권력 스스로를 향해 기울어 있었는지를 분명히 따져 물어야 할 시점이다. 성과를 나열하는 것으로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문제는 방향이고, 태도이며, 책임이다. 올해 국정은 유난히 ‘속도’를 앞세웠다. 그러나 속도는 곧바로 졸속으로 이어졌고, 졸속은 설명 부재와 책임 회피를 낳았다.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정책 결정은 반복됐고,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돌아온 답은 “불가피했다”는 말뿐이었다. 국정 운영이 사후 해명에 의존하는 순간, 민주적 통치는 이미 균열을 시작한 것이다. 국회의 책임은 더욱 무겁다. 연말마다 되풀이되는 입법 강행과 속도전은 이제 관행을 넘어 고질이 됐다. 다수 의석을 앞세운 처리 과정에서 숙의와 조정은 형식으로 전락했고, 소수 의견은 걸림돌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빠른 결론이 아니라 정당한 과정에서 성립한다. 절차를 무시한 입법은 법률로 포장된 권력 행사에 불과하다. 리더십의 문제는 더 뚜렷하다. 강한 리더십과
통일교 자금 수수 의혹이 정치권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이번 사안은 단순한 금전 스캔들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 정치의 도덕적 최소선이 어디까지 무너졌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종교 단체의 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의혹 앞에서, 국민은 다시 한 번 묻고 있다. 대한민국 정치에는 아직 지켜야 할 선이 남아 있는가? 정치와 종교의 결탁 의혹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 종교의 이름으로 모인 자금이 정치적 영향력 확보의 수단이 됐다면, 이는 헌법이 보장한 종교의 자유를 정면으로 왜곡하는 행위다. 동시에 정치가 종교 조직을 지지 기반이나 재정적 후원자로 활용했다면, 그 순간 정치의 공공성은 사라지고 사익의 도구로 전락한다. 민주주의는 정책과 가치의 경쟁으로 유지돼야지, 은밀한 자금 흐름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치권의 태도다. 의혹이 불거졌음에도 사과는커녕 “개인적 일탈” “관계가 없다”는 말로 선을 긋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국민의 눈에는 이미 정치권 전체가 도덕적 공범처럼 비친다.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책임져야 할 주체들이 의혹 앞에서 침묵하거나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은, 스스로 신뢰를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 이번 논란이 특정
국회가 회기 마지막 날인 어제 61년 만에 필리버스터를 강제로 중단시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여당은 “입법 마비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고, 야당은 “민주주의 파괴이자 소수 의견 묵살”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역사적 전례 자체가 희귀할 뿐 아니라, 절차적 정당성을 둘러싼 공방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던져야 할 근본적인 질문은 한 가지다.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국회의 모습인가?”라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아당인 국민의 힘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입법 관련해서 강력한 필리버스터 저항을 통해 올해 국회 회기 마지막날 필리버스터를 진행하고 있는 나경원 의원에 대해 시작 13분만에 우원식 의장이 의제와 무관하다며 마이크를 끈 것이 발단이 되어 의장석은 여.야 의원들이 몰려 나와 난장판이 됐다. 필리버스터는 원래 소수 의견 보호를 위한 제도적 안전장치다. 다수의 입법 독주를 견제하고, 충분한 토론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려는 민주주의의 기초 장치다. 하지만 최근 필리버스터는 소수의 권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여야가 서로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사용하는 정치적 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