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전국 곳곳에서 예비후보들의 출마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정치의 계절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지역 곳곳에서 기자회견장과 SNS를 통해 출마 의지를 밝히는 후보들의 목소리는 저마다 “지역 발전”과 “새로운 변화”를 외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시민의 뜻을 모으는 가장 중요한 제도이며, 출마 선언은 그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 선언이 단순한 정치 이벤트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지방선거는 중앙정치의 연장선이 아니라 지역 주민의 삶과 직결된 생활정치의 장이다. 도로 하나, 학교 하나, 산업단지 하나가 지역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지방선거를 돌아보면 정당 간 대결 구도나 중앙정치의 프레임에 갇혀 지역 의제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방선거가 ‘정권 중간평가’라는 이름으로 소비될 때, 정작 지역 주민의 삶은 정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출마를 선언하는 후보들이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왜 출마하는가, 무엇을 바꾸려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이다. 단순한 구호나 포장된 슬로건으로는 더 이상 시민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 지역의 인구 감소, 산업 침체, 청년 유출, 교육과
국회 본회의에서 광주·전남 행정통합 법안이 통과됐다. 그러나 대구·경북, 대전·충남은 여전히 제자리다. 왜 하필 광주·전남만인가. 이 질문을 회피하는 순간, 이번 입법은 균형발전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입법 절차는 지켜졌을 것이다. 상임위 심사와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 표결을 통과했다면 형식적 합법성은 갖췄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단지 절차의 기술이 아니다. 다수의 숫자가 모든 정당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국회가 토론의 장이 아니라 의석수의 전시장으로 전락할 때, 다수결은 설득이 아닌 압박이 된다. 현재 국회 의석 구조상 더불어민주당은 단독 처리 능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 하느냐다. 야당의 우려를 충분히 반영했는가. 지역 간 형평성 논란을 해소하려는 정치적 노력이 있었는가. 다른 권역 통합안과 보조를 맞추려는 최소한의 조율이 있었는가. 이런 질문에 명확한 답이 없다면, 이번 처리는 “정상적 입법”이라기보다 “힘의 정치”에 가깝다. 광주·전남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핵심 지지 기반이다. 그런 지역의 통합안만 먼저 처리된 현실은 의도와 무관하게 정치적 해석을 낳는다. 다른 지역은 준비가 덜 됐고, 광주·전
정치의 본령은 국민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있다. 국정은 예측 가능해야 하고, 권력은 책임 있게 행사되어야 하며, 정쟁은 민생 앞에서 절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에는 기대보다 불안이, 신뢰보다 피로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국민들이 지금 걱정하는 것은 특정 정파의 유불리가 아니라, 이 나라 정치가 과연 제 기능을 하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 물음이다. 무엇보다 정치의 언어가 거칠어졌다. 타협과 조정은 사라지고, 극단적 대립과 정쟁만이 증폭되고 있다. 국회는 법과 제도를 논의하는 숙의의 장이 아니라, 힘겨루기와 장외투쟁의 연장선처럼 비쳐진다. 정치는 문제 해결의 기술이어야 하지만, 오늘의 정치는 갈등 확대의 기술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 사이에서 국민은 피로해지고, 국정은 지연되며, 국가적 과제들은 표류한다. 더 큰 문제는 민생의 체감 온도와 정치의 관심 온도 사이의 괴리다. 경제는 불확실성이 커지고, 서민의 삶은 팍팍해지며, 미래 세대의 부담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의 시선은 정략적 이해관계와 권력 지형에 과도하게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준다. 국민이 체감하는 위기와 정치가 반응하는 위기 사이의 간극이 커질
정치권과 공공 영역에서 반복되는 이른바 ‘폭탄선언’이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중대한 비위 의혹, 권력 내부의 갈등, 정책 뒤집기, 심지어 국가 운영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발언까지 예고도, 검증도 없이 던져지는 한마디가 사회 전반을 뒤흔든다. 문제는 그 ‘폭탄’이 과연 국민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특정 세력과 개인의 이해를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폭탄선언의 본질은 공익적 내부고발일 수도 있다. 부패와 불법, 은폐된 권력 남용을 드러내는 용기 있는 발언이라면 그것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경종이 된다. 실제로 역사 속 많은 내부고발이 제도 개혁의 출발점이 되었고, 국민의 알 권리를 확장시켜 왔다. 이런 경우라면 폭탄선언은 ‘파괴’가 아니라 ‘정화’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사뭇 다르다. 시점은 절묘하게 정치 일정과 맞물리고, 내용은 선정적이되 구체적 근거는 빈약하며, 발표 이후 책임 있는 후속 조치는 사라진다. 던지고, 흔들고, 잠적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폭로는 있지만 입증은 없고, 파장은 있지만 책임은 없다. 그 사이에서 상처 입는 것은 국민 신뢰와 제도 안정성이다. 특히, 권력 핵심부 인사나 영향력 있는 인물의 ‘감정 섞인 폭로’는
미국이 다시 관세 카드를 꺼내 들 때마다 한국 경제는 유독 크게 흔들린다. 철강, 자동차, 반도체, 배터리까지문제는 품목이 아니라 반복되는 패턴이다.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의 국내 정치 상황 때문이다”, “외교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말은 되풀이되지만, 결과는 늘 뒤늦은 대응과 불리한 조건의 수용이었다. 국민이 묻는 질문은 단순하다. 그간 미국과 관세 협상을 어떻게 해왔기에, 매번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인 협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 ‘자유’는 언제나 비대칭적으로 작동해 왔다. 미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예외 조항과 국가안보 논리를 적극 활용해 왔고, 우리는 그때마다 “동맹”이라는 단어 앞에서 협상력을 스스로 낮췄다. 관세는 경제 문제이지만, 협상은 철저히 정치의 영역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정치의 언어로 제대로 말해본 적이 있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특히 미국의 관세 정책은 일관된 자유무역 원칙이 아니라 국내 정치 일정과 산업 로비에 따라 움직여 왔다. 대통령 선거, 중간선거, 러스트벨트 표심, 노조의 압박—이 모든 것이 관세 결정의 배경이 된다. 이는 새로운 사실도 아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 권력의 출발점이자 한계를 동시에 규정한다. 모든 공적 권한은 헌법에 근거해 부여되며, 그 행사는 다시 헌법과 법률에 의해 통제된다. 이는 개인이나 특정 기관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법치국가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다. 공적 책임을 확인하는 절차는 이러한 헌법 질서를 현실에서 작동하게 하는 핵심 장치다. 헌법 제1조가 선언하듯,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원칙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위임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위임 이후에도 권력의 행사 과정은 지속적으로 검증받아야 하며, 그 검증은 법률에 정해진 절차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헌법이 전제하는 책임 정치이자 법치 행정의 기본 구조다. 공적 책임을 확인하는 절차는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제도다. 법치국가에서 권력은 신뢰가 아니라 규범에 의해 유지된다. 권한의 범위, 행사 방식, 사후 검증 절차가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권력은 필연적으로 자의성을 낳는다. 헌법과 법률이 요구하는 절차적 통제는 권력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보호하는 장치다. 이러한 절차의 핵심은 사실 확인과 법적 평가의 분리다. 헌법 질서 안에서 공적
제1야당 대표의 단식이 장기화되고 있다. 정치적 계산이든, 극단적 항의 방식이든 그 평가는 엇갈릴 수 있다. 대통령은 단식중인 제1야당 대표의 단식 현장을 찾아 그 이유부터 들어야 봐야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있다. 단식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대통령이 침묵으로 일관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대통령이 직접 현장을 찾아 단식의 이유를 듣는 것이 국가 지도자로서의 최소한의 책무다. 어떻게 보면 대통령의 그런 모습이 양분화 되어 있는된 국민통합으로 이루어질수도 있는 문제이므로 파격적인 행보는 크게 손해 볼 일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결정은 이대통령의 몫이다. 그것이 모두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식은 정치적 메시지의 최후 수단이다. 대화의 문이 닫혔다고 느낄 때 선택되는 극단적 방식이다. 그렇다면 그 신호를 가장 먼저 읽고 응답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대통령이다. “정치 공세”라는 말로 치부하거나, 거리 두기로 일관하는 태도는 갈등을 해소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 대통령의 방문은 굴복이 아니다. 정치적 양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국정 최고 책임자가 갈등의 당사자에게 직접 이유를 묻고, 국가적 위기의 신호
정치는 국민의 삶을 안정시키고 내일을 준비하게 하는 공적 장치다. 그러나 최근의 정치 풍경은 그 본령과 거꾸로 가고 있다. 정쟁은 일상이 되었고, 책임은 실종되었으며, 국정은 표류하고 있다. 권력은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만 할 뿐, 민생 앞에서는 침묵한다. 이 혼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국민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정치권의 모습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확대”에 가깝다. 사안마다 여야는 합리적 해법보다 정치적 유불리를 먼저 계산한다. 국회는 토론의 장이 아니라 대결의 링이 되었고, 정책은 협의의 산물이 아니라 정파적 선언문이 되었다. 그 사이 서민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자영업자는 버티기조차 힘겨워하며, 청년들은 미래를 설계할 토대를 잃어가고 있다. 정치적 혼란의 대가는 고스란히 국민이 치른다. 경제 불확실성은 투자와 일자리를 위축시키고, 외교·안보의 신뢰도는 흔들린다. 행정은 결단을 미루고, 정책은 표류한다. 국정이 멈추면 사회의 시계도 멈춘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수록, 사회적 갈등은 깊어지고 공동체의 연대는 약해진다. 더 큰 문제는 책임의 실종이다. 혼란이 반복되는데도 사과하는 이는 드물고, 책임지는 이
새해애도 어김없이 '내로남불'이 일상화 되는 느낌이다. 공정과 정의를 외치던 목소리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 순간 달라지는 장면을 우리는 너무 자주 목격해 왔다. 남에게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는 무한한 관용을 베푸는 태도. 이른바 ‘내로남불’은 더 이상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구조적으로 고착된 병리 현상이 되었다. 문제는 그 폐해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제는 비판의 대상이었던 일이 오늘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된다. 과거에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던 사안이 입장이 바뀌면 ‘정무적 판단’으로 둔갑한다. 원칙은 상황에 따라 접혔다 펴지는 선택지가 되었고, 기준은 적용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이 과정에서 일관성은 사라지고, 국민의 판단 기준은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공기관에서는 책임 회피가 관행처럼 반복되고, 사법 영역에서는 선택적 엄정함이 의심을 낳는다. 언론과 시민사회를 자처하는 일부 영역에서도 자신에게 불리한 문제에는 침묵하거나 논점을 흐리는 일이 적지 않다. 비판의 잣대가 공익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때, 그 피해는 결국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내로남불이
2026년 병오년(丙午年)의 새 아침이 밝았다. 말의 해가 지닌 역동성과 불의 기운은 늘 변화와 전환을 상징해 왔다. 그러나 새해가 단지 달력의 교체에 그친다면, 병오년의 의미는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새해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성찰하고 무엇을 바꾸려는가에 따라 비로소 시작된다. 지난 한 해 우리 사회는 크고 작은 균열을 겪었다. 법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 제도의 신뢰 상실, 책임을 회피하는 권력, 그리고 분열을 부추기는 언어들이 공동체의 근간을 흔들었다. 성장과 효율이라는 명분 아래 기본 원칙이 후순위로 밀려났고, 그 결과 사회 곳곳에는 피로와 냉소가 깊게 스며들었다. 문제는 위기 그 자체가 아니라, 위기에 대한 태도였다. 병오년은 결단의 해여야 한다. 불합리와 타협해 온 관행, 불법과 부정을 눈감아 온 구조, 책임을 남에게 전가해 온 정치와 행정의 오래된 습속을 과감히 끊어내지 않는다면, 새해는 또 하나의 반복된 실망으로 기록될 것이다. 새 출발은 미봉책이 아니라 원칙의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특히 공적 권한을 위임받은 이들의 자세는 새해의 성패를 좌우한다. 법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 말로만 책임을 말하는 무책임, 국민을 분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