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APEC 정상회의는 겉으로는 경제 협력과 기술 협업을 강조했으나, 그 이면에서 드러난 국제 정세의 흐름은 훨씬 더 심각하고 냉혹했다. 세계는 지금 기술·안보·산업이 결합된 새로운 경쟁 구도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와 AI를 중심으로 동맹국 중심의 공급망 제재망을 강화하고 있으며, 중국은 독자 기술 체계를 구축하며 주변국에 경제·외교적 압박을 높이고 있다. 이번 회의는 한국이 이 변화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켰다. 따라서 지금 한국 외교에는 근본적 전략 재정비가 요구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외교 정책은 여전히 각 현안에 따라 움직이는 ‘반응형 외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각각 제시하는 의제에 따라 사안별 대응을 반복하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런 접근은 우리 외교의 자율성을 축소시키고, 양국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지를 줄이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이제 한국은 미·중 경쟁 속에서 끌려가는 외교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설정한 장기 전략을 중심에 둔 외교 틀을 마련해야 한다.
이번 APEC에서 한국은 AI, 반도체, 기후 기술 등 중요한 주제를 제안했지만, 국제사회에 “한국이 만들어 갈 미래 전략”을 분명히 보여주는 데는 다소 부족함이 있었다. 기술·경제 질서가 급변하는 시대에는 ‘수용 국가’로 머물러서는 생존할 수 없다. 우리는 글로벌 규범 형성 과정에서 ‘규범 제안자’, ‘질서 설계자’로 자리 잡아야 한다. 기술 표준, 데이터 규범, 해양안보, 탄소중립 등 분야에서 한국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다른 문제는 외교의 안정성이다. 최근 한·미·일 협력이 강화되는 흐름은 긍정적이지만,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언제든 그 기조가 흔들릴 수 있다. 중국과의 관계 또한 경제적 연결성은 높지만 외교적 신뢰는 취약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복잡한 외교 환경에서 한국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전략적 자율성, 즉 어떤 상황에서도 유지할 수 있는 외교 원칙과 기준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는 특정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자국의 국익을 중심에 둔 균형 감각에서 출발한다.
외교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대전환기에 한국은 갈림길에 서 있다. 지금처럼 단기 이슈 중심으로 대응하는 방식으로는 국익을 충분히 지킬 수 없다. 기술·안보·경제를 통합한 국가전략 로드맵, 외교정책의 우선순위 설정, 지역·글로벌 전략의 위계 마련 등 근본적 개편이 시급하다. 정부는 외교의 체질을 ‘상황 대응형’에서 ‘전략 주도형’으로 전환해야 한다.
APEC은 끝났지만, 한국 외교의 시험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세계가 새로운 규범과 동맹 구조를 만들어가는 이 시기에 한국이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지금의 전략 결단에 달려 있다. 더 늦기 전에 국익 중심의 외교 대전환을 추진해야 한다. 지금이 그 분기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