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제기되는 “미국에 3,500억불 선불 지급” 논란이 경제계와 금융시장을 술렁이게 하고 있다. 한국의 외환 보유액은 약 4,160억 달러 수준이다. 그 중 3,500억 달러라는 막대한 규모의 자금이 단기간에 유출된다면, 외환시장은 즉각 요동칠 것이다. 환율은 급등하고, 외국인 투자 자금은 빠져나가며, 금융시장은 패닉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은 다시 생존을 위하여 IMF로 가는가?”라는 극단적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금융시장의 패닉을 너머 대한민국이 패닉에 빠지게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 되는 셈이 되는 것인데다 그렇다면 미국과의 이런 협상의 단초가 무엇이고 왜 이런 화급한 협상을 했었을까 라고 하는 여론이 일고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 1997년의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상황과 같은 위기 국면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비약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거시경제의 체질을 크게 개선했다. 외환 보유액은 당시보다 10배 이상 늘어났고, 단기 외채 비중은 꾸준히 낮아졌다. 외환 스와프 라인, 다변화된 수출 구조, 글로벌 금융시장에서의 신용도 역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해졌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일본과 유사한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IMF 또한 올해 한국 경제의 성장률을 0.9%로 전망하면서 금융위기 가능성보다는 생산성 제고와 구조 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선불 지급’과 같은 대규모 외환 유출이 현실화될 경우다. 3,500억불은 한국 외환 보유액의 80%를 넘는 규모이며, 단순한 정부 예산 집행이 아니라 외화 결제라면 시장 충격은 불가피하다. 환율 급등은 수입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기업의 외화 차입 비용도 급등할 것이다.
가계 부채가 GDP의 100%를 웃도는 상황에서 금리 인상과 물가 상승이 겹치면 내수는 급격히 위축될 수 있다. ‘실물 경기 침체 + 금융시장 불안’이라는 이중 충격은 결국 신용 경색과 자본 유출로 이어지며 악순환을 부를 수 있다. 그 결과, 한국은 IMF 구제금융을 받지 않더라도 유사한 수준의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은 과도한 위기론도, 근거 없는 낙관론도 아니다. 정부는 해당 거래가 실제 존재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집행되는지, 재원은 어디에서 마련되는지를 국민 앞에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모호한 정보가 시장에 떠돌수록 공포 심리는 확대되고 투기적 공격이 용이해진다. 외환시장 안정 조치, 단기 외채 관리, 재정 건전성 확보 계획 등을 동시에 발표해 시장에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 시급하다.
한국 경제는 과거 IMF 위기를 겪으며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그 이후 20여 년간 축적해온 외환 보유, 거시건전성 관리 능력, 글로벌 신뢰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 체력만으로 위기를 막을 수는 없다. 시장은 신뢰로 움직이고, 신뢰는 정보의 투명성과 정책의 일관성에서 비롯된다.
“다시 IMF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우리 경제의 현재 체질을 점검하고, 위기 대응 체계를 강화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공포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 인식과 선제적 대응이다.
국민과 시장이 정부의 능력과 의지를 믿을 수 있도록,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예측 가능한 경제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위기론을 잠재우고 한국 경제를 지키는 최선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