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하마스가 가자지구 전쟁을 끝내기 위한 평화 구상의 첫 단계에 합의하면서 그간 양측에 종전을 종용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재 외교가 새 국면을 맞았다. 다만 지난 2년간 치열하게 싸워온 양측의 서로에 대한 불신이 극심한 데다 양측 간 이견이 완전히 해소됐는지 확실하지 않아 이번 휴전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될지 더 지켜봐야 한다는 평가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8일(현지시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글을 올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가자 평화 구상 1단계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합의 사실을 확인하고서 이스라엘 정부의 합의 승인을 위해 오는 9일 내각 회의를 소집했다고 밝혔다.
하마스도 성명에서 합의 사실을 밝힌 뒤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완전한 휴전 이행을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번 합의에 따라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인질·포로 교환과 이스라엘군 철수 등이 실제 이뤄질 경우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가자 전쟁이 마침표를 찍는 수순으로 접어드는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주요 외교 목표를 달성하게 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직후 '골프 절친'인 부동산 사업가 스티브 위트코프를 중동 특사로 발탁해 취임도 하기 전에 이스라엘과 카타르를 방문하게 하는 등 가자 종전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트럼프 대통령 취임 닷새 전인 지난 1월 15일 1단계 휴전과 인질·수감자 맞교환에 합의하자 다 자기 덕분이라며 기세등등했으나 종전은 그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가자지구를 "중동의 리비에라"로 탈바꿈하겠다는 전후(戰後) 구상까지 발표했지만, 이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2단계 휴전까지 나아가지 못했고, 이스라엘이 지난 3월 중순 공습을 재개하면서 가자지구에서 다시 희생자가 속출했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전쟁의 원인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당사자들을 압박해 어떻게든 합의를 성사하려고만 했지 지속 가능한 합의를 설계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중재국인 카타르 및 이집트와 긴밀히 협의하며 이스라엘과 하마스에 휴전 합의를 종용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시로 휴전 합의가 임박했다고 주장했지만, 협상은 교착 국면을 벗어나지 못했고 불만이 쌓인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25일 하마스가 진심으로 협상을 타결하는 대신 "죽고 싶어 한다"고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이스라엘도 지난 9월 하마스 지도부를 암살하기 위해 이들이 체류 중인 카타르를 공습하는 등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 노력에 '장애물'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백악관에서 네타냐후 총리와 회담한 뒤 가자지구 평화 구상을 발표하면서 휴전 협상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20개 항으로 구성된 이 계획은 인질·포로 교환과 이스라엘군 철수, 하마스 무장 해제,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감독하에 팔레스타인 기술관료로 구성된 임시 통치기구의 가자 재건, 국제 평화유지군 파견 등이 골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동의를 먼저 확보한 상황에서 하마스에 공을 넘겼고, 지난 3일에는 하마스가 사흘 내로 평화 구상에 합의하지 않으면 "지옥이 펼쳐질 것"이라고 '최후통첩'성 공개 경고를 했다.
하마스는 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지난 3일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대로 모든 인질을 석방하겠다고 밝혔고, 이스라엘과 세부 협상에 착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와 위트코프 중동 특사를 협상에 관여시키는 등 상황을 계속 챙기면서 양측을 압박했고 결국 이날 합의 발표라는 결과를 끌어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하마스를 압박하는 동시에,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도 자신의 평화 구상을 받아들일 것을 끈질기게 종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취임 후 8개월간 교착된 협상에 돌파구가 열렸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외교 정책 우선순위인 가자 전쟁 종식에 가까워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이전 휴전 합의가 두 달 만에 파탄난 전례가 있고, 합의 세부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라 합의 이행을 안심할 수 없다는 관측도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아직 전쟁이 끝날지 불확실하다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카타르, 이스라엘과 하마스 누구도 이날 성명에서 이스라엘이 요구하고 하마스가 거부해온 하마스 무장 해제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번 합의 발표는 공교롭게도 오는 10일로 예정된 노벨평화상 수상자 발표를 하루 앞두고 이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가 각지의 분쟁을 해결해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주장해왔으며, 미국 언론 다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 전쟁을 서둘러 끝내려는 이유 중 하나로 노벨평화상 수상 욕심을 꼽았다.
네타냐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고 지난 7월 밝혔으며,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사려는 다른 나라 정상들도 추천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다만 노벨위원회의 수상자 선정 절차를 고려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가자 합의 때문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노벨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후보 추천은 지난 1월 31일 마감됐다.
올해 평화상에는 244명의 개인과 94개 단체가 추천됐는데 위원회는 50년이 지나야 후보를 공개한다.